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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크 라이프
    3분 북리뷰 2024. 1. 18. 18:55

    요시다 슈이치 / 은행나무 (2015)

     

     


     

     

    목 차

     

    파크 라이프

    플라워스

     


     

     

    "소설이나 에세이를 잘 읽진 않지만, 그래도 묘사하듯 글을 잘 써보고 싶어."

     

     

    얼마 전 장강명의 '책 한번 써봅시다'를 읽었다.

    2023.12.28 - [글쓰는 인생] - 책 한번 써봅시다

     

    글을 잘 쓰고 싶은 학생과 같은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책 속에서 요시다 슈이치를 알게 되었다.

    책 속에서 장강명은 그와 그의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사물이나 풍경을 묘사하던 차에 교본이 된 것은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요시다 슈이치의 중편소설 <파크 라이프> 였다.

    묘사가 길어지는데도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게 신기했다.

    그 책을 필사하면서 효율적인 묘사란 어떤 것인지,

    화자의 내면이나 행동과 주변 환경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배웠다.'

     

    궁금했다.

    '도대체 묘사를 얼마나 잘했으면, 상까지 받았을까?'

    '그런데, 무엇을 묘사한 거지?'

    '그래서, 내용은 뭘까?'

     

    교보문고에서는 이미 품절이 되었고, 다행히 학교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었다.

    생각보다 책은 얇고 가벼웠다.

    단숨에 파크 라이프를 읽고는 필사를 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는데, 그렇게 느꼈던 부분을 아래와 같이 옮겨보았다.

     

     


     

    (14p 발췌)
    이때 곧바로 얼굴을 쳐들어서는 안 된다.
    우선 넥타이를 잡아 늘이고, 지하철 매점에서 사온 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다.
    얼굴을 들기 전에 눈을 감고 몇 초 정도 그대로 있는 게 좋다. 천천히 심호흡을 한 다음 단번에 얼굴을 쳐들고 눈을 뜬다.
    순간적으로 감았던 눈을 치뜨면 근경, 중경, 원경을 이루는 대분수, 녹음이 울창한 나무들, 데이코쿠 호텔이 갑자기 본래의 원근감을 무너뜨리며 반전하여 한꺼번에 시계(視界)로 돌진해 들어온다.

    (중략)

    무엇 때문인지, 눈물이 솟아오를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눈물의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하면, 바로 그 상태에서 뭔가 쓱,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눈물은 곧 말라버린다.

     

    (21p 발췌)
    라이카 카메라를 든 노부부가 그 꽃봉오리를 보려고 나무 밑에서 발꿈치를 들고 목을 잡아늘이고 있었다. 구두 사이즈가 컸는지 할머니의 뒤꿈치가 밖으로 나와 그 둥근 발뒤꿈치에 붙인 반창고가 보였다.

     

    (24p 발췌)
    여자가 스타벅스 컵을 들어 보여주었다. 컵을 쥔 긴 손가락은 투명한 매니큐어를 발랐는지 젖어 있는 듯 보였다.

    (중략)

    눈 아래 보이는 신지 연못의 짙푸른 수면 위로 물오리가 만든 파문이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다. 물오리들은 가끔씩 물속으로 얼굴을 쑤셔 넣고 푸드덕푸드덕 몸을 떨며 날갯짓을 했다.

    (중략) 음색이 그렇다기보다 그 높낮이가 매력적이었다.

    여자의 손에는 손수건이 들려 있었는데, 손수건에는 스카프처럼 엷은 바탕에 새빨간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29p 발췌)
    한참을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풍경이라는 게 실은 의식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었다.
    파문이 퍼져가는 연못, 이끼 낀 돌담, 나무들, 꽃, 비행기구름, 그 모든 것들이 시계에 들어와 있는 상태라는 건, 실제로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 것과 같다.
    뭔가 한 가지, 예를 들어 연못에 떠 있는 물오리를 보았다고 의식하고서야 비로소 다른 모든 것에서 따로 떨어진 물오리가 물오리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중략)

    의자에 앉아 훅, 숨을 내쉬자 뉴욕의 거리거리를 쏘다닌 데서 오는 피로가 갑자기 몰려들었다. 몸을 구부리고 부은 정강이를 주물렀다.
    가슴 뿌듯한 통증으로 다리 전체가 찌릿하게 저렸다. 
    눈앞에 펼쳐진 가로수길에는 낙엽이 뒤덮여 있고, 멀리서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새까만 도베르만의 목줄을 잡은 은발의 노부인이 다가오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세련돼 보여서 난 그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32p 발췌)
    내 옆에서 히카루도 잠들어 있었다. 입을 약간 벌리고 잠이 든 히카루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파리해 보였다. 파도 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좌석 등받이에서 땀이 밴 등을 떼고 숨을 죽여 천천히 히카루의 몸을 덮치듯이, 될 수 있는 대로 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팔을 세워 엎드린 자세로 코끝이 서로 닿을 만한 위치에서 몸을 지탱하고, 히카루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까이 가져갔다.

    맞닿지는 않았지만 그 입술이 보드랍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만큼 그렇게 하고 있었나,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히카루를 껴안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히카루가 눈을 뜨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히카루 얼굴의 어느 부위에 내 입술을 들이대고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꽤 오랫동안 밀착하고 있었던 것 같다.

     

    (34p 발췌)
    발 앞에 흩어져 있는 꽁초들을 구두 코끝으로 긁어 한 곳으로 모았다가 다시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걷어차 흐트러뜨렸다.

     

    (39p 발췌)
    얼떨결에 돌계단을 헛딛고는 당황해서 옆에 있던 큰 바위를 얼른 붙잡았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다시 돌아보았지만, 이미 예닐곱 계단 정도 내려와버려 구릉 위의 그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44p 발췌)
    그녀는 깔깔 소리 높여 웃었다. 귓불에는, 이런 걸 피어싱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하는 건지, 아무튼 반지같이 생긴 두꺼운 링을 박아 넣어 둥근 구멍이 뻥 뚫렸다. 그 구멍 속으로 고마자와 도로에 체증으로 길게 줄지어 선 자동차 행렬이 보인다.

     

    (49p 발췌)
    광장에는 벤치도 몇 개 없고 사람 그림자도 안 보여 푸릇푸릇한 잔디와 모래밭에 봄볕만 아쉽게 내리쬐고 있는 듯 보였다.

    잔디광장 앞에 높은 펜스로 둘러쳐진 육면체 테니스 코트가 있는데, 바로 앞 세 개의 코트에서 대학 동아리로 보이는 집단이 한 무리는 스매싱 연습을 하고 있고, 한 무리는 둥그렇게 모여 선배로부터 경기 지도를 받고 있었다.
    펜스 너머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대학 시절이라는 게 그리 오래된 옛날 일도 아닌데, 그들과 한데 섞인 양복 차림의 내가 한 박자 어긋나게 라켓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보다 한 템포 빠른 건지, 아니면 늦은 건지 알 수 없다. 공이 오기도 전에 지레 라켓을 휘두른 건지, 아니면 공은 이미 등 뒤로 넘어간 건지.

     

    (58p 발췌)
    ".. 그때 히카루가 너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든?"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시 내 발걸음은 멈춰져 있고 몸은 힘없이 전신주에 기대고 있었다. 노상방뇨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달려오던 자전거가 활 모양을 그리며 빙 돌아 피해 간다. 

     

    (61p 발췌)
    우타가와 부부의 집 거실에서 30분 정도 사운드를 꺼놓은 채 '뉴스 스테이션'을 본 다음 라거펠트를 목욕시켰다. 뉴스에 비친 영상, 특히 전쟁 상황을 보도하는 영상을 사운드 없이 보고 있자니 인간이란 몸뚱이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사실이 새삼 너무나 당연해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이자 빈 라덴도, 부시도, 파월도, 샤론도, 아라파트도, 뉴스 해설자까지도 모두 심각한 말들을 쏟아내어, 마치 그 말들이 사고(思考)를 낳고 거기서 태어난 사고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운드를 죽여보면 인간들의 몸뚱이만 보인다.
    빈 라덴의 야윈 몸이 어떤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지만 반대로 건강한 부시의 몸이 어떤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소리 없는 뉴스 영상에서는 신기하게도 몸뚱이들만이 부당한 피해를 입고 있는 듯 보였다.

     

    (66p 발췌)
    물이라도 마실까 해서 침대에서 일어나 나갔다. 라거펠트가 침대 밑에서 등을 동그랗게 말고 자고 있었다.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고 에비앙을 꺼내 컴컴한 소파에 앉아 병째 마시고 있는데, 푸르스름하고 커다란 달이 밤하늘의 한쪽 구석에 떠 있는 게 불편한 듯 보였다.

    (중략)

    맨션을 지나자 봄밤에나 느낄 수 있는, 시트 위에 남아 있는 체온처럼 미지근한 바람이 두 볼을 어루만진다.
    벌써 5년 내내 계속 입고 있는 트레이닝 바지의 고무줄이 늘어나서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슬금슬금 흘러내린다. 허리끈을 좀 조여 매려해도 한쪽 구멍으로 끈이 빨려 들어가 빼낼 수가 없다.

     

    (76p 발췌)
    "도대체 왜 모두들 공원으로 몰리는 거죠?" 하고 긴토 씨에게 물은 적이 있다. 긴토 씨는 평소와는 달리 진지하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한숨 돌리려는 거 아니겠어?" 하고 시원스레 답했다.
    딱 떨어진 대답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대꾸 없이 그대로 지나치려 하자,
    "보라고, 공원이란 장소에선 말이야,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랄 사람은 없잖아. 오히려 누굴 붙잡고 권유를 하거나, 연설을 하거나, 뭔가를 하려고 하면 내쫓기지" 하고 덧붙였다.

     

    (77p 발췌)
    전화를 걸 때 20:34였던 비디오의 시계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땐 20:43이었다. 1분만 더하면 딱 10분이 됐겠지만, 그 1분 안에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리도 없는데 그 1분으로 뭔가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9분 동안 나눈 대화 중에 히카루는 최근에 비디오로 본 <영원과 하루>라는 그리스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머리를 말리면서 이야기를 하는지 가끔 수화기에 타닥타닥, 타월이 와닿는 잡음이 들렸다. 마지막까지 히카루의 입에서 결혼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89p 발췌)
    그녀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지, 거의 다 먹었을 즈음에 콧등에 맺힌 땀을 닦았다. 재킷을 벗은 그녀는 반팔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테이블에 얹은 처음 보는 그녀의 팔이 그리는 곡선이 옆에 있던 은 스푼과 겹쳐졌다.

     

    (92p 발췌)
    공원으로 한 발자국 들어서자 술로 달아오른 두 볼을 밤바람이 시원스레 스치고 지나간다.
    산책로에는 외등이 띄엄띄엄 서 있어서, 그 바로 아랫부분만 어둠 속에 파란빛으로 동그라니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00p 발췌)
    옆에서 그녀는 뒷짐을 지고 턱을 앞으로 바짝 내민 자세로 사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질문에는 말없이 고개만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한 작품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다 보고는 옆에 서 있는 내 어깨를 일부러 부딪혀 다음 작품 앞으로 옮겨가게 한다.
    그때 처음 안 거지만 그녀의 볼에는 귀밑에서부터 흐르는 턱선 위에 사마귀가 있었다. 턱선 밑으로 가려질 것도 같고, 아무래도 드러날 것도 같은 미묘한 장소에 있는 흐릿한 색의 사마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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